제9장 <명산대택(名山大澤)> ❉ 78절~81절/ 80절
△ 633~636
昆池碣石(곤지갈석) ; 昆 형 곤, 池 연못 지, 碣 우뚝 선돌 갈, 石 돌 석,
▲ (명승지로는) 곤지와 갈석산,
△ 637~640
鉅野洞庭(거야동정) ; 鉅 클 거, 野 들 야, 洞 골짜기 동, 庭 뜰 정
▲ 거야와 동정호라네.
* 昆 형 곤 ; ① 형, 맏
② 함께, 같이
③ 종족 이름
* 池 연못 지 ; ① 못 → 백두산 천지(天池) ; 백두산 정상에 있는 큰 못. 가장 깊은 곳은 312 m, 남북거리 4.85㎞,
동서거리 3.55㎞, 둘레 14.4㎞, 면적 9.165㎢로 매우 넓고 깊은 호수이다.
② 물길, 도량
↪ 곤지(昆池) → 곤명 전지(昆明 滇池) ; 운남성 곤명의 서남쪽에 위치한 담수호로 중국에서 여섯 번째로 큰 담수호다.
고지대에 위치하여 주변의 산수가 빼어나, 고원의 명주(高原明珠)라는 칭호가 있다.
여기에서 ‘전(滇)’은 운남성의 옛 이름이다.
한 무제가 장안에 만들었다가 송나라 때에 없어진 인공호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碣 우뚝 선 돌 갈 ; (우뚝)선 돌, 산이 우뚝 솟은 모양
* 石 돌 석 ; ① 돌,
② 비석
↪ 갈석(碣石) → 갈석산(碣石山) ; 지금은 중국 하북성 창려현 북쪽에 있는 산으로 발해에서 15 km 거리에 있다.
갈석(碣石)이란 이름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石)’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갈석산에 비석을 세운 인물은 다름 아닌 진시황이다. 갈석산 동쪽에 진황도(秦皇島) 시(市)가 있는데 이는 진시황이
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시황은 천하를 평정한 후인 서기전 220년부터 215년까지 자신이 차지한 영토를
순시했는데 동쪽 끝으로 갈석산까지 왔다. 이곳까지가 진나라의 강역이었고, 그 동쪽은 조선의 강역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대단한 역사적 사유가 있기 때문에 천자문에도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바로 신라가 백제를 물리치고 북한산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고, 이에 오늘날까지 그 봉우리를 비봉(碑峰)이라
부르고 있는 것과 같다.
조선의 김정호도 『대동지지(大東地志)』 「방여총지(方輿總誌」에서 “ (갈석산이 있는) 류현(絫縣)은 ... 고구려에 속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갈석산 동쪽의 요동 지역이 (고)조선에 속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85절 <맹가돈소 사어병직> 부기 ◆ 흉노와 고조선 참조)
* 鉅 클 거 ; 크다, 강하다,
* 野 들 야 ; ① 들, 성 밖, 마을, 시골, 논밭 → 옥야(沃野) ; 기름진 들
② 촌스럽다, 질박하다 → 야인(野人)
③ 거칠다, 비천하다, 길들지 않다 → 야성(野性)
↪ 거야(鉅野) ; 중국 산동성 태산(太山) 동쪽에 있는 거대한 평야지대.
한나라 말 여포의 부하 설란(薛蘭)이 거야에 주둔하다가 조조군에게 죽었다고 한다(195년).
이 설란의 14세손이 바로 당 (唐)나라가 668년에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 초대 책임자인 설인귀(薛仁貴)이다.
『사기(史記)』「봉선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한무제 3년(기원전 132년), 황하가 범람하여 호자구(瓠子口)에서 둑이 터져 동남쪽으로 흘러 거야택(巨野澤)을
지나 사수(泗水)로 유입되어 회수(淮水)와 통했다. 이로써 양(梁)과 초(楚) 일대는 매년 재해를 입게 되어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 먼 훗날 수호지 양산박(梁山泊)의 무대가 되었다.
↪ 泊 배 댈 박 ; 배를 물가에 대다, 몸을 기탁하다.
↪ 108 명 호걸들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입니다.
* 洞 ㉮ 골짜기 동 ; ① 골짜기, 동굴 → 두문동(杜門洞) 무주구천동(茂朱 九 天洞)
② 동정호
③ (國) 마을
♧ 두문동 ; 조선 개국 때에 고려의 유신(遺臣) 72인이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다하고 지조를 지키기 위해
개성 인근 이곳 골짜기에 들어와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선왕조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이들을 불살라 죽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무주구천동 ; 전라북도 무주군·장수군과 경상남도 거창군·함양군에 걸쳐 있는 덕유산 내의 계곡으로
맑은 물과 절묘한 기암, 천고의 수림 등이 어울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독특한 풍치를 자아내는 33 천하절경이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백련사까지 28㎞ 계곡을 따라 이어져 있다. 구천동(九天洞)은 아홉의 천동이요 천동(天洞)은 동천(洞天)이요, 동천은 '산에 싸이고 내에
둘린 경치 좋은 곳'이란 뜻에서 '신선이 사는 세계'라는 뜻으로 나아갔다.
↪ 한번 가서 신선이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 통할 통 ; 통하다, → 통촉(洞燭) ; 아랫사람의 형편 등을 헤아려 살피다. ↪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庭 뜰 정 ; ① 뜰, 마당 → 정원(庭園),
② 집안 → 가정(家庭)
③ 조정, 관청 → 법정(法庭)
↪ 동정(洞庭) → 동정호(洞庭湖) ; 호남성과 호북성의 경계가 되는 거대한 호수로 서울 면적의 약 8배가 된다고 한다.
풍광과 경치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데, 동서남북 사방 5백리에 이르러
오호(五湖)라고도 한다. 호수 안에는 군산(君山) 이라는 섬이 있어 역사상 유명한 누각인 악양루 (岳陽樓)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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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와 아틸라 그리고 악마 :
앞 16절에 보면, ▲ (오랑캐들을) 멀거나 가깝거나 똑같이 (한 신민으로) 대하니,
▲ (사방 오랑캐들이) 항복하여 우리 임금의 신하가 되었네.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기원전 202년 진나라를 멸하고 한(漢)이 건국되었으나, 만리장성 밖 새외(塞外)에 있는 흉노족은 언제나 한의
골칫거리였다. 이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기틀을 새로이 한 왕이 바로 무제다. 한 무제(漢武帝)는 북쪽의 흉노뿐이 아니라 동쪽 조선도 밀어내고 그 자리에 4개의 군을 설치하기도 했다.(BC 108년)
이 같은 업적을 노래한 구절이 바로 16절이다.
한 무제에게 밀린 흉노는 그 후 어찌되었을까? 흉노가 한나라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나자 그 쪽에 있던 중앙아시아
여러 족속들은 밀려오는 흉노의 무기, 전술 체계 등을 받아들여 강력한 군사체계를 갖추게 되었으니, 이들이 누구인가? 바로 <70절 부기(附記) 말과 전차부대> 아르카임의 후예들이 아닌가!
이들의 잠자는 본능을 깨워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후예들이 계속하여 연쇄반응을 일으켜 서쪽으로 치고
나가게 되었다. 다음은 이 후의 이야기이다.
서기 350년께 동유럽에 정체불명의 훈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게르만족의 변경에 살고 있었던 알란족을 침략했고, 파죽지세로 밀려왔다. 훈족의 강력한 화살과 날렵한
기마 부대를 당할 유럽의 나라는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훈족을 ‘신의 저주’라 부르고 하느님의 도움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결국 서기 453년에 훈족의 왕 아틸라는 로마 베네치아를 정벌하던 중 급사해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해졌지만,
그 대신 훈족의 날랜 기마술과 강력한 무기에 자극받은 동유럽의 여러 민족이 발흥하여 로마를 압도했으니,
이것이 서양의 고대 세계를 끝낸 (476년 로마 제국의 멸망) ‘게르만족의 대이동’이었다. .
아틸라가 이끌던 ‘훈’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흉노다.
비록 흉노 제국은 중국에 멸망했지만, 그들이 만들어 놓은 발달한 군사조직과 철제 무기는 세계 최강이었다.
이에 자극 받아 유라시아 각지에서 발흥한 나라들은 경쟁적으로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유럽인 계통이었던 에프탈인(Ephthalites, 현재의 우즈베키스탄)도 스스로 ‘백인 흉노’(White Huns)라고 칭할 정도였다.
아틸라가 죽고 난 100년 뒤에 다시 동양에서 밀려온 아바르족은 5세기에 몽골을 중심으로 거대한 유목제국을 이루어
고구려와 연합했던 ‘유연’이라는 나라의 일파(一派)이다. 유연(柔然)은 돌궐(튀르크)에 쫓겨서 서쪽으로 흘러갔고,
등자(발걸이)와 같은 고구려의 무기와 마구를 서양에 전파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아바르족은 오늘날의 헝가리에 정착해 빠르게 서양인에 동화했다.
동유럽에 등장한 훈에 혼쭐이 난 서양 세력은 중세 이후 최근까지 아틸라에게 악마라는 이미지를 덧씌웠다.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바그너의 오페라로도 유명한 북구의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에도 악인으로
등장한다. 근대 이후 서양이 강조하던 ‘황화’(黃禍, Yellow peril – 황인종에 의한 재앙)라는 동아시아에 대한 편견의
시작으로 아틸라가 사용된 것이다.
아시아인에 의한 공포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3세기에 들어서자 서방세계는 또다시 아시아 몽골군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되었다.
1, 2차 원정에서 몽골군은 우선 러시아를 유린한 다음 폴란드,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석권하고 아드리아 해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육박하였다.
1253년에서 1260년 사이에 감행된 3차 원정에서 몽골군의 기병들은 메소포타미아를 휩쓸어 세계적으로 견고하기로
유명한 고성(古城) 바그다드를 불태웠고 다시 소아시아, 사이프러스까지 짓밟고 이집트를 위협하였다.
몽골군의 3차에 걸친 원정으로 세계는 바야흐로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특히 제2차 원정 때는 유럽 전역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기독교도들은 이것을 천벌이라 생각하고 신에게 용서와 가호를 빌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기독교 일파는 신의 용서를 빌기 위해 순례하며 서로 피가 흐를 정도로 채찍으로
때리면서 기도하고 참회했다. 유럽에서는 몽골군의 원정을 ‘신의 채찍’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러한 '신의 채찍' 의식은 오늘날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황인종에 대한 공포는 57절 ◆ 우리의 견벽청야 - Ⅱ에서 박한식 교수가 밝혔듯이
기독교의 선악관에 영향을 미쳐 황인종을 ‘악마’로 여기게 되었으며, 이는 곧 퓨리턴(Puritan-청교도)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멸종으로 근대 역사에 기록된다.
아시아의 장안에서 시작된 나비의 날개 짓이 서구인의 정신세계를 뒤 흔들어 놓은 것이다.
이것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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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구절은 79절<안문자새 계전적성>, 다음 구절은 81절<광원면막 암수묘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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