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07절) 현가주연 접배거상

한라오스 2021. 2. 17. 15:45

                                              제13<내칙(內則)> 99~114/107

849~852

絃歌酒讌(현가주연) ; 악기 줄 현, 노래 가, 술 주, 잔치 연

                       ▲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흥겨운 술잔치에,

853~856

接杯擧觴(접배거상) ; 사귈 접, 잔 배, 들 거, 술잔 상

                       ▲ 술잔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축복하네.

 

* 악기 줄 현 ; 악기 줄 관현악(管絃樂) ; 관악기, 현악기의 합주

 

* 노래 가 ; 노래(하다) 가객(歌客) ; 노래를 잘 하거나 잘 짖는 사람

현가(絃歌) ; 현악기와 어울려서 하는 노래

 

* 술 주 ; 주선(酒仙) ; 세속을 초월해서 술을 즐기는 사람

               ② 잔치 주연(酒宴)

 

* 잔치 연 ; 잔치하다

                   ② 모여 이야기 하다 잔치 연회에서는 宴(연)을 주로 쓴다.

 

* 사귈 접 ; 사귀다

                  ② 대접하다 접대(接待) ; 손님을 맞아 시중을 들다

 

* 잔 배 ; (), ()는 배()의 속자(俗字)

                一杯 一杯 復一杯(일배 일배 부일배) 한잔 먹세, 한잔 먹세, 또 한잔 먹세 그려!

접배(接杯) ; 술잔을 주고받다.

 

* 들 거 ; ① 들다, 여럿이 더불어() 마음을 합하여 일제히 손()으로 '들다

                ② 등용하다 선거(選擧)

                ③ 행동거지 거동(擧動) ; 그 사람의 행동하는 짓이나 태도

 

* 술잔 상 ; 뿔로 만든 술잔은 (),

                  ② 나무로 만든 술잔은 (),

                  ③ 옥으로 만든 술잔은 (),

                  ④ 세 발 달린 왕가의 술잔은 ().

                        통상적으로 잔(Cup)을 의미하기로는 ()를 제일 많이 쓴다.

거상(擧觴) = 건배(乾杯) ; 술잔을 들어 서로 축복을 나누면서 술을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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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요갱(楚腰鏗) ;

                           楚 나라 이름 초, 허리 요, 거문고를 타는 소리 갱 양갱이 洋鏗 ; 바이올린의 낮춤 말

 

초요갱은 이름이나 부모, 태어나고 죽은 년도를 알 수 없으나, 세종조의 궁중 악무를 유일하게 전승한 예인(藝人)으로서, 조선왕조실록에 16번 거론된 경국지색의 미모였음이 분명하다.

다만 초요갱의 호 마지막 글자가 금옥 소리, 또는 거문고를 타는 소리 갱이라는 것으로 보아 당시 궁중 무악의 대가

박연(朴堧 1378 우왕 4 ~ 1458 세조 4)의 전수자로써 활약했다는 점을 감안하여 붙여진 호()임을 추정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은 글을 잘 짖고 글씨까지 잘 쓴 명필로 세종이 아끼던 아들이었는데, 초요갱을

어여삐 여겨 옆에 두고 글을 가르치고 금전적으로 도움도 주고, 궁궐에서 새로 제정한 악무(樂舞)를 박연 밑에서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평원대군은 144519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초요갱은 대군의 후원으로 배운 악무(樂舞) 덕분에 궁궐 행사 때 궁궐을 드나들면서 두 번째 남자를 만났다.

 

그는 다름 아닌 여섯 번째 화의군으로 평원대군의 사후, 끈질기게 구애를 한 끝에 초요갱의 마음을 얻었다. 계유정난

이후, 영의정에 오른 수양대군은 반대파를 숙청하고자, 화의군과 초요갱이 간통을 했다는 구실을 삼아 죄를 물었다.

화의군은 변방으로 유배를 가고, 초요갱도 죄를 물었으나, 박연의 전수자로써 악무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면죄되었다.

그 후 화의군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단종 복위에 연류 되어 35세의 나이에 사사(賜死) 되고, 궐안을 드나들면서 악무를 추던 초요갱은 세 번째 남자인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 계양군을 만난다.

 

계양군은 수양대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으로 초요갱의 미모에 반해서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초요갱을 품은 계양군도 37세에 요절하고 만다. 세조 9년의 일이었다

 

계양군이 죽은 후, 초요갱 앞에 나타난 네 번째 남자는 좌의정의 아들 신자형이었다. 신자형은 본처를 내치고 초요갱에게 안방을 내주었다. 신자형이 초요갱의 흉을 보던 여종 2명을 때려 죽인 일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고 세조는 신자형을 잡아들여 추궁을 하고 죄를 물어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우고 공신록을 받은 신자형의 직첩(職牒)

빼앗아 버렸다.

 

일반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초요갱은 남자들에게 횡액(橫厄)을 가져다주는 요부(妖婦)’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요갱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를 죽인 적이 없다. 사내들이 그저 자기를 놓고 싸우다가 그들끼리 벌어진 불상사일 뿐이었다. 죽음도 불사한 사내들은 부나방처럼 초요갱을 향해 달려들다가

날개를 태워버리기도 하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세조가 죽고 예종 12월 실록에는 난신의 첩초요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남이(南怡)와 함께 했던 또 다른 고위층

인사의 첩으로 있다가 남이 세력이 제거될 때, 한양에서 추방당하여 평양 관기로 보내진 것 같다.

5개월 후 평양부의 관비가 사헌부에 신고를 하였다. 평안도 도사 임맹지가 초요갱과 간통을 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아직 세조가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국상(國喪) 중이었기 때문에 관리의 이 같은 행위는 국법을 어기는 중죄였다. 실록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임맹지와 달리 초요갱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건을 끝으로 초요갱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실록에서 볼 수 없다.

 

세종에서부터 문종, 단종, 세조, 예종에 이르기 까지 대략 25년 동안, 다섯 임금이 교체되는 조선 초 격변기에 불꽃처럼 살았던 여인이 바로 초요갱이었다.

초요갱은 실록에 좋든 싫든 간에 16차례나 나오지만 황진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물론 사건 사고나 나라에

큰일을 했을 때에 실록에 올라가는 것이지만, 초요갱이 놀았던 신분사회 계층이 황진이가 놀았던 계층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기에, 실록에도 그 이름이 올랐다고 봐야 한다.

 

이제 우리는 조선조 초요갱과 황진이, 그리고 어우동, 3인의 기첩(妓妾) 여인을 어떻게 평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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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구절은 106절<주면석매 남순상상>,  다음 구절은 108절<교수돈족 열예차강>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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