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85절) 맹가돈소 사어병직

한라오스 2021. 2. 5. 10:41

 

                                                11<중용(中庸)> 85~91/ 85

673 ~ 676

孟軻敦素(맹가돈소) ; 맏 맹, 굴대 가, 도타울 돈, 근본 소

                       ▲ 맹자는 (성선설에 기반 하여) 소성을 돈독히 하자고 주장했으며,

677 ~ 680

史魚秉直(사어병직) ; 역사 사, 고기 어, 잡을 병, 곧을 직

                       ▲ 사어는 (신하된 도리를) 굳게 지켜나갔다.

 

* 맏 맹 ; 맏이, 처음

                ② 孟子(맹자) ; (BC 372~BC 289) 전국시대 () 나라 사람. 이름은 (). 공자(孔子 BC. 551~479)

 

* 굴대 가 ; 굴대 바퀴 가운데의 구멍에 끼우는 쇠나 나무

                   ② 맹자의 이름

 

* 도타울 돈 ; 도탑다 = 돈독(敦篤) = 돈후(敦厚) ; 인정이나 사랑이 깊다.

 

* 근본 소 ; 흰 빛, 희다 소설(素雪) ; 흰 눈

                   ② 한 빛깔의 무늬가 없는 피륙 소묘(素描) ; 단색으로 대체의 윤곽을 선만으로 그린 그림

                   ③ 근본, 본바탕, 소성(素性) ; 본디 타고난 성품

돈소 ; 하늘에서 받은 소성(素性), 즉 밝고 착한 본성(本性)을 돈독히 하다.

 

맹가돈소(孟軻敦素) ;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한 맹자는 호연지기(浩然之氣 - 마음속에 차 있는 너르고 크고 올바른 기운)를 잘 기르면 그 기운이 가슴에 가득 차서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연지기를 기르는 길은, 즉 돈독히 하는 길은 올바른 행위를 꾸준히 실천함으로써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소양(素養)을 돈독히 하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국가가 나서서 초중등교육을 의무로 하는 것은 바로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돈독히 기르기 위함입니다. 돈독하지 않으면 쉽게 부서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맹가돈소(孟軻敦素) 담긴 뜻입니다.

 

 ** 돈화문(敦化門) ;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은 5궁으로,

정궁인 경복궁 ,

일종의 별궁이었으나 실제로는 조선의 정궁 역할을 한 창덕궁 ,

그 옆에 있던 창경궁 일제 시대에는 창경원으로 격하

임진왜란 때 임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정식 궁궐이 된 덕수궁 ,

광해군 때 지어진 별궁으로 서궁으로 불린 경희궁 ,

   이 중에서 창덕궁의 정문을 돈화문(敦化門)이라 하는데,

   여기서 돈화란 백성을 정성스럽고 깊이 있게 가르치고 이끌다라는 뜻이다.

   이 안쪽의 비원(祕苑 - Secret Garden)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적 수준의 궁중 정원이다.

 

* 역사 사 ; 역사 사기(史記) ; 한나라 사마천이 쓴 역사서

                   ② 사관(史官)

 

* 고기 어 ; 물고기 어류(魚類) ; 물고기의 무리

                                ↪ 이 글자와 혼동하기 쉬운 자로는 글자가 있다.

                                    漁<고기를 잡을 어> 로써, 고기를 잡는 어부를 표현할 때는 漁夫(어부)라고 쓴다.

사어(史魚) ; 춘추시대 위(衛) 나라 대부(大夫), 성격이 강직하여 곧잘 임금에게 직간을 아뢰었다고 한다.

 

* 잡을 병 ; (손으로) 잡다 병권(秉權) ; 권력을 잡다

                   ② 마음으로 지키다 병이(秉彝) ;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굳게 지키다(떳떳할 이)

 

* 곧을 직 ; 곧다, 굽지 아니하다, 직립(直立) ; 똑바로 서다

                   ② 바르다, 옳다, 직간(直諫) ; 윗사람에게 기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곧장 아뢰다.

병직(秉直) = 병이(秉彝) ; 인간의 떳떳한 도리를 굳게 지켜 나가다.

                               ..............................................................................................

 

◆ 흉노와 ()조선

                                                                                                                * 일러스트 곽노익 선생                                                                                                                                                                                                              

 앞서 80 절에서 흉노가 한나라 무제 시대에 서북(西北)으로 밀려났고, 그 여파는 서쪽 저 멀리 로마제국의 붕괴를

 가져왔다고 하였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일까?

 

무제는 동북 방향의 조선이 흉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그들의 부흥을 도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를 차단하고자

조선도 침략하였다. 장성이 북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 갈석산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과, 시황 자신이 직접

이곳까지 순시하여 갈석산이라 이름 짓고 순수비를 세운 것을 보면, 진시황 시대까지 동북에 있는 조선 또한

중국 땅을 넘보는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리하여 기원전 108년 조선을 밀어내고 국경(-친황다오)(-진황도) 너머에 낙랑군을 설치했다.

이에, 이곳에서 밀린 마한은 부여/고구려로, 변한 은 부여/고구려/백제로, 진한은 남쪽으로 내려와 신라가 되었다.

    ↪ 백제 26대 성왕(聖王)538년에 수도를 웅진(熊津 - 지금 공주)에서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가 중흥을 꾀하여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고을을 일러 부여(扶餘)라 한다.

        우리는 지금 부여라는 고을의 역사 시원(始原)이 수천 년 전의 조선에까지 닿아 있음을 보고 있다.

 

요하의 동쪽, 즉 요동은 어디인가?

       △ 사기』 「몽염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시황제 26, 몽염(116절 참조)은 집안 대대로 진나라의 장군을 지냈으므로 몽염 역시 장군이 되어

제(齊) 나라를 공격해 대파시키고 내사(內史- 장관)를 제수받았다.. 진이 천하를 차지하자 몽염에게 30만 군사를 주어

북의 융적을 쫓아내게 하고 하남을 거두었다. 장성을 쌓는 데 지형이 험한 곳을 이용해 요새로 삼았으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遼東)까지 길이가 만리(萬里)에 이르렀다 “ - 만리장성의 유래

     ↪ 여기에서 요동(遼東)이라 함은 요수의 동쪽이라는 말이 아니고 동쪽에 있는 요수(遼水)’라는 말이다.

        ‘요수라 함은 진나라 시절에 장안이나 낙양을 중심으로 하여 보면 멀리 있는 강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 멀 요), 하여 요수(遼水)나 요하(遼河) 모두 같은 말이다.

사기』「봉선서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천자(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 후에 그곳을 떠나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갈석(碣石)에 이르렀다.

다시 요서(遼西) 일대를 순행하고 나서 북방(北方)의 변경을 한 바퀴 돌고 황도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조선(朝鮮)을 정벌했다.

   ↪ 여기에서 요서(遼西)라 함은 바로 요수(遼水)의 서쪽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한나라는 요수를 경계로 조선과 대치하였다는 말이다.

 

이후 영역이 동쪽으로 더 넓혀지자, 요수는패수(浿水) 난하(灤河)로 이름이 바뀌었고, 더 멀리 있는 강이

요하(遼河)가 되었다. 고려 말에 요동정벌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만 하여도 여기에서 요동이라 함은 난하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지 요하의 동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요하의 남쪽에는 요동반도(遼東半島)가 있다. 이 반도는 요하의 남쪽에 있으므로,  요남, 또는 요서 반도라 했어야 하는데도 요동반도라 함은 옛날 요하는 이 반도의 서쪽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쪽에 있는 강은 바로 난하이다..

 

진황도를 넘어와서 요동에 설치된 한나라 사군(낙랑, 진번, 임둔, 현토)은 불과 30여 년 만에 진황도와 맞닿아 있던

    낙랑군만을 남기고 곧바로 소멸되고 말았다. 이리하여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 (313년간) 하였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3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이란 대단히

순간에 가까운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 속에 일시적으로 존재하였던 3개의 치지(治地)를 뭐 대단한 식민통치기구인

것처럼  한사군이라고 하는 역사술어’로 사용한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일 뿐이다. 이는 일본제국이 조선을 식민지로

영구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역사에서 타율성을 강조하는 근거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명색이 한 국가의 정통

역사학자라는 자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강단(講壇)에서 활용하고 있다.

 

한나라가 멸망(220)한 뒤에도 낙랑이 1백여 년간 더 존속할 수 있게 된 것은 낙랑군의 성격이 통치기구라기보다는

진황도의 서쪽 한족(漢族)과 동쪽의 한족(韓族)을 연결하는 무역과 교류 등을 수행하는 국제도시였기 때문이다.

낙랑이 한반도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은 참으로 한심한 소리일 뿐이다.

이 낙랑지역은 바로 조선의 수도 왕험성(王險城), 즉 평양성(平壤城)이 있던 자리이다.

 

평양(平壤

     여기에서 하나 더 살펴 볼 것이 있다.

     한무제는 요동을 침략한 후에 낙랑군을 세우고 왕험성 도읍 이름을 사랑하는 자기 누이동생 평양공주(平陽公主)

      이름을 따서 평양(平陽)이라 하였다. 이후 세월이 흘러 한나라 멸망 후 평양(平陽)이 평양(平壤)으로 되었다.

      ↪ 이 같은 일은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다. 80절에서 거야(鉅野)사기에서는 거야(巨野)로 표기하고 있다.

          『사기』「한무제본기에 다음 구절이 있다.

      “ 한무제가 그 누이인 평양공주에게 과연 이런 절세가인이 세상에 있느냐고 묻자 그 절세가인은 이연년의

        누이동생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이연년의 동생을 입궐시켜 후궁으로 삼았다.”

 

일연(1206-1289)은 삼국유사 제1<기이(紀異)> 편에서 ;

1) 동파(東坡)의 지장도(指掌圖)에는

      “흑수는 장성 북쪽에 있다.”,  “진한의 남쪽에 흑수가 있다.”

         ↪ 여기에서 흑수라 함은 오늘날의 흑룡강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장성 북쪽에서 발원하여 진황도 인근으로 흐르는              난하(灤河 - 옛 패수浿水)를 말한다 .

2) 신당서(新唐書)

      “변한의 후손들은 낙랑 땅에 있었다.”

3) 후한서(後漢書)에는

       “변한은 남쪽에 있고 마한은 서쪽에 있고, 진한은 동쪽에 있다.”

       “()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에 오자 마한이 동쪽의 땅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김부식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서 ;

       그의 문집을 보면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이 있는데, 이렇게 말하였다.

삼가 듣건대 동해 밖에 세 나라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 변한. 진한입니다.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 때에 강한 군사가 백만이어서

남으로는 오(), ()의 나라를 침범하였고, 북으로는 유(), ()과 제(), ()지역을 뒤흔들어 중국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수나라 양제가 망한 것도 요동정벌에서 비롯한 것이며.......”

이를 종합해 보면,  한나라, 즉 고조선은 다음 홍산문명에서 거론 되는 내몽고 자치구 적봉시(赤峰市)에서부터 ~        북쪽으로는 대흥안령 산맥 남쪽 기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 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신라는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다

    앞 16,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그리고 80<흉노와 아틸라 그리고 악마>를 보면

    신라는 스스로 자신들을 흉노의 후예로 자처했음을 알 수 있다.

 

❉ 삼한대부인(三韓大夫人)

     이성계는 이미 600여 년 전에 이런 역사를 알아 나라 이름을 고구려를 넘어 조선이라 했으며,

    우리 한민족 역사상 가장 지혜(智慧)로웠던 세종께서는 그 조선을 넘어 장모를 일러 칭하기를

    ‘삼한대부인(三韓大夫人)’이라 하였던 것이다.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조선의 강역 :

        1712년에 청이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의 압록강과 토문강 물이 수원에서 갈라지는 곳에

        일방적으로 정계비를 건립하였는데(이 비는 1931년 만주사변 직후 소실되었다.) 조선말 이 비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엇갈렸다. 청나라가 간도(현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정계비문의 토문강을 근거로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주장했다.

1677년 청나라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백두산 지구를 포함한 500km까지를 청의 발상지로 삼고 봉금구(封禁區)

정한바 있다 <조선왕조실록><청사고>에 보면 청태조 누루하치의 6대조(육룡이 나르샤) 포고리옹순은

백두산 천지에서 <나무꾼과 선녀> 막내 페쿨렌(佛庫倫)에게서 태어나 백두산 동남의 회령 지방에 살았다.

청나라의 발흥에 따라 세종 이후에는 두만/압록강 이남으로 조선의 국경이 축소 되었지만, 조선 중기 까지만 하여도

그 당시 제작된 여러 지도를 보면, 두만/압록을 지나 현재의 흑룡강 까지를 고구려 발해의 영역으로 보아 조선의 강역으로 인식함이 일반화 되어 있었다. 동북 3, 즉 흑룡강성, 길림성, 요령성은 우리 선조들이 말 달리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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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구절은 84절<세숙공신 권상출척>,  다음 구절은 86절<서기중용노겸근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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