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북한산 사모바위의 비밀

한라오스 2020. 11. 22. 09:19

* 제1막, 무대 ; 2020 년 서울 북한산

서울의 진산 북한산에는 크고 작은 여러 봉우리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사모바위 봉우리는 그 봉우리 정상이 매우 넓고 또한 비교적 오르기 쉬워, 봄가을 주말에는 이 봉우리에 못 해도 천여 명 이상의 인파로 넘쳐난다. 이 사모바위를 옆으로 뒤돌아가 보면 바위 밑에 작은 동굴이 있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인형 상이 있고 이가 바로 1968121일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하여 남파된 북한 인민군 김신조이다. 입구에는 설명문을 볼 수가 있다. 124군 부대로 알려진 이들은 모두 31명이 남으로 내려왔지만 김신조 홀로 살아남았다.

왜 김일성은 이들을 내려 보내 박정희를 제거하고자 했을까?

박정희 한 사람 제거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력통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김일성은 그렇게 어리석은 지도자였을까?

 

* 제2, 무대 ; 1백여 년 전 구한말 경북 칠곡군

1905년 경상북도 칠곡에서 박성빈은 8남매를 두었는데, 다섯째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박상희(朴相熙)로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여러 지식인이 그러하였듯이 그 또한 사회주의자로써 신간회, 조선중앙일보의 지국장,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하였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대구 10월 항쟁 사건으로 경찰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셋째 동생이자 집안 막내였던 박정희는 그가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동생이었으며, 박정희 또한 12살 위인 형을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더 존경하고 따랐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깡통 시골 박씨네 가족 중에서 그래도 제대로 교육을 받은 이는 박상희와 박정희였던 것이다..

이때 박상희의 나이가 41세였으니 아까운 젊은이가 채 피지 못하고 저 피안의 언덕을 넘어버리고 말았으니 선산의 영재를 잃은 집안의 슬픔과 원통함이 오죽하였으랴!!

훗날 박상희의 첫째 딸 박영옥은 작은 아버지 박정희의 주선으로 결혼하게 되는데, 신랑 이름이 바로 김종필이다.

 

* 제3막, 무대 ; 일제강점기 경북 구미의 인텔리겐차

박상희가 선산 지역에서 사회주의자로 항일운동을 하던 때에 그와 벗했던 이로 황태성(黃太成, 1906 ~ 1963)이 있었다, 박상희는 구미 보통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지만, 황태성은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훗날( 경기고등학교로 개명)를 거쳐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게 된다. 박상희와는 달리 서울에 유학한 것을 보면 상당히 가문이 부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일독립운동으로 많은 옥고를 치른 것을 보면 제대로 된 인테리겐차(intelligentia)(intelligentia) 였던 것이다. 박정희 또한 황태성을 박상희 형과 똑같이, 어쩌면 더 존경하고 따랐다.

해방 이후 194610월 박상희가 경찰 총격으로 사망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북으로 향하여 판문점을 넘었다.

해방이 되자 박상희, 황태성이 그토록 아끼던 박정희도 일본군 장교복을 벗고 변신하여 군에 입대하여 정보장교로 복무하게 되지만, 1948년 여순 사건으로 그가 군부 내 남조선노동당 하부 조직책으로 활동했음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19506월 한국 전쟁 발발로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억세게 운이 좋은 사나이다.

 

* 제4막, 무대 ; 1961년 서울, 반도호텔

1961년 황태성이 그토록 아끼던 후배 박정희가 남조선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황태성은 김일성을 설득하여 남한으로 잠입하여 반도호텔(지금의 롯데 호텔 자리)에 여장을 풀고 남북협상을 위해 박정희에의 접근을 시도하다가 수사기관에 걸려들어 그만 박정희는 만나 보지도 못하고 체포되고 만다. 그리고 그는 196312월 간첩죄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고향 땅 상주에 안장되어 있다.

박정희는 젊은 시절 그의 멘토였던 황태성을 왜 서둘러 죽여버려야 했던 것일까? 전쟁 중에도 적의 밀사는 해하지 않는 법이거늘!!

그는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국 장교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공산주의자로써 활동했던 과거의 어두운 이력이 미국에 어떻게 비추 일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쿠데타 초기의 불안한 집권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리라.

자기를 그토록 따랐던 멘티로부터 배반을 당하여 어이없게도 죽임을 당한 멘토의 절망감을 우리는 어떤 필설로 표현해야 할까!,

 

* 제5막 피날레, 무대 ; 다시 사모바위 

, 이제 처음 김신조로 돌아가자

박정희가 어이없게도 황태성을 혁명 군사재판을 통해 죽여 버리자 김일성의 분노는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김일성은 수년에 걸쳐 많은 비용을 들여 특수부대를 조련하여 남으로 내려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10만 명을 선발 조련하여 최종적으로 31명을 선발하였다 한다.

현대 한국사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