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정치(政痴)
예수와 정치(政痴)
행복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시는 분들의 글모음
1. 예수와 정치
종교는, 특히나 그리스도교는 힘든 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로마의 지배 아래 고통의 날들을 보낼 때, 암울했던 민중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고자 태어난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마태 5:3~12)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해주리라”(마태 12:29,29)고, 민중들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가슴을 열었다.
“아흔아홉 마리 양은 산에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라”고 하였다.(마태 18:10~13) 소외된 자를 돌보라는 애기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누가 6:20)라고, 미래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주었다.
‘가난한 자’를 해석하는 서적은 수없이 많다. 그 일은 종교 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내 애기를 하겠다.
갈릴리 지평에서의 예수의 친구들은 돈 있고 부유한 기득권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재산 빼앗기고, 농토 빼앗기고, 올데갈데없이 부랑하는 홈리스(Homeless)들이었다. 그래서 이어오병(二魚五餠)의 기적이 말해주 듯 4, 5천 명 씩이나 예수라는 지도자를 따라서 몇 십 리 길을 며칠 씩 부랑했던 부평초 같은 민중들이었다. 예수는 바로 이들에게 천국을 주었다.
미래에의 희망을 주었다.
뒤에서 구체적으로 애기하겠지만, 현대국가의 목표는 부국강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행복 증진에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 아래서 부자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자기들끼리 유유상종(類類相從)하여 잘들 살아간다. 파이를 키운 다음에 나누어 먹자고, 국민을 속이는 가운데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이 아니라 가만히 내버려둬라. 부자의 껌 한 조각은 가난한 사람의 한 끼 식사가 되는 세상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 보고서를 보면 10억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한국의 부자는 2011년 말 현재 14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인 5천만 명의 0.28%다. 물론 이에는 10억 원 이상의 금융자산가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만, 부자들은 통상 일정액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근사치에 가까운 숫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국민 0.28%의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인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1642년에 발생한 ‘청교도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의회를 통하여 영연방을 다스리게 된 올리버 크롬웰은 가난한 부하들이 권력을 나눠달라고 하자 딱 잘라 거절했다.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아무런 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통치는 이제껏 항상,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재산의, 재산에 의한, 그리고 재산을 위한 통치일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재산을 지닌 우리들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익은 물론이고 당신들의 이익까지도 고려하면서 다스릴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애기를 꺼내는 까닭은, 그리고 뒷장 <시민 K, 교회를 나가다>에서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우리사회에 1천만 명이라고 하는 막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세뇌와 확정편향의 심리’에 의해 잘못된 정치적,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제대로 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낮은 자리로 내려와 낮은 자들을 섬기는 사랑의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사회의 미래는 획기적으로 변화되리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흔히 노래를 잘 못 부르는 사람을 가리켜 ‘음치(音痴)’라고 부르고, 길 눈이 어두운 사람을 가리켜 ‘길치’라고 부르듯이, 나는 정치적 감각이 어두운 분들, ‘세뇌와 확정편향의 심리’에 의해 잘못된 정치 사회적 인식을 가지신 분들을 정치(政痴)라고 부르고 싶다. 특히나 가장 앞장서서 이 사회를 예수의 사랑으로 감싸고 나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께서 정치(政痴)에서 벗어나 사랑과 따뜻함의 정치(政治)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쓰고, 책의 제목을 <예수와 정치(政痴)>라고 하게 되었다. 이 땅에 예수의 사랑의 정치가 펼쳐진다면 우리 국민 모두는 진실로 행복한 세상을 맞게 될 것이다. 단, 14만 명만 빼고서 말이다.
- 다루어 본 주제 -
좌파, 우파란 무엇인가? 우파는 우리사회를 행복하게 해 줄까?
지역감정은 왜 생겼을까?
한국교회는 왜 ‘종북 타도’를 외치는가?
대한민국은 누가 지배하는가?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의로운 사회란?
행복한 국가를 위하여!
2. 어느 장삼이사의 허튼소리
나는 학문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어느 특정 분야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대한민국의 한 시민일 뿐입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이지요.
그러다 보니 문장이 많이 서툴고, 어법도 맞지 않고, 논리도 안 맞고, 글의 전개도 어설프고, 이리저리 많이 엉망입니다. 사용하는 단어도 학문적 용어가 아닌 일상의 우리 생활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이 조야(粗野)한 글이나마 그 속에 담고자 하는 내 마음만은 치열한 것이오니 독자 여러분의 양해 바랍니다.
이 책 속에 담긴 대부분의 글이 많은 분들의 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 분들의 훌륭한 글을 읽고서 그 분들의 의견에 공감하다 보니, 이 좋은 글들을 한데 모아 내 친구들에게도 알리고 싶어, 글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냥 막 실었습니다. 글 주인님들의 넓으신 양해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이 글은 답답한 우리사회의 정치현실에 대해, 목로주점에서 소주 한 잔 놓고 내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나의 푸념입니다. 전문가 분들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따라서 훌륭하신 분들께서는 읽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이 책을 덮으십시오.
그럼, 내 친구님들!
훌륭하신 분들의 멋진 글 속으로 같이 한번 들어가 봅시다.
✩ 장삼이사 : 시중의 평범한 보통사람
3. 살인사건에서 누가 이익을 얻는가?
일전에 친구와 더불어 대구에 내려갔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 는 차 속에서, 박원순 시장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에 친구는 박 시장이 계속하여 무소속으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시 장이라는 자리는 정치적 자리고, 현대정치는 정당정치를 기반으로 하므로 박 시장이 야권 성향이라면, 민주당에 가입하여, 제대로 모양 세를 갖추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내 대답에, 친구는 다음과 같 이 말했다.
“야, 민주당은 전라도당이고, 전라도는 용공적이지 안냐?”
세상에 !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아직도 민주당은 전라도당이고 전라도 사람은 용공적이라는 인식이 이토록 남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한국의 최 일류 대학을 나온, 자칭 타칭 인텔리라는 사람의 인식이 이러하니, 다른 이들은 더 이상 거론하여 무엇 하겠는가?
그 나마도, 내 앞이라 차마 전라도 사람은 빨갱이라는 말은 못하고,
에둘러 ‘용공적(容共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
왜?
전라도 사람을 빨갱이라는 극단적 용어를 써 가면서 우리 국민의 일부를 이토록 증오하며 매도하게 되였을까?
누가 그랬을까 ?
그들은 이렇게 하면서 어떤 이익을 얻었을까 ?
흔히 잘 알다시피 살인 사건이 나면, 이 사건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이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것이 수사의 기본이라고 한다.
누가?
무슨 이익을 얻고자?
자기나라 국민을 애써 빨갱이로 몰아붙였을까?
4. 아는 만큼 보인다.
4-1 우물 안 개구리
북한 영상을 보면,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또는 김정일에 대해 극한의 열광적인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볼 때, 김정일 같은 존재는 지구촌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애써 외면하고 자기의 독재권력 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바동거리는 거지같은 존재인데도 말이다. 중국에서는 등소평의 개방정책이 성공한 이래, 그 애비 김일성이도 초청하고, 아들 김정일도 초청하여, 개방의 효과를 보여 주지만, 이 거지 같은 작자들은 말로는 아! 이것이 천지개벽이구나 하면서도, 실제로는 백성들의 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하여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고, 핵 개발이나 하고 앉았으니, 참으로 한심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하겠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은 도대체 왜 그토록 어리석게도 김일성, 김정일 2대도 모자라 김정은 3대에 이르기 까지 그럴까?
왜 그러는 것인가?
그들은 어려서 부터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 수십 년 동안에 걸쳐 세뇌 되여 왔기 때문이다. 유홍준 교수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 않는가.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 행동 밖에는 못하는 것은, 그 이상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북한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바깥세상을 모르고, 아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설혹 알았다고 하더라도 세뇌된 정신으로는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정신의 세뇌이다.
일본이 우리를 병탄하여, 가장 먼저 취한 정책이 바로 우리를 세뇌하기 위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는 일이었지 않는가?
세뇌하여 꼭두각시(괴뢰)로 만들어라!
그리하여 영원히 부려먹자!
세상에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세뇌 되여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고요?
정말 그럴까요?
세뇌 되여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세뇌 되여 있는 것을 모르는 법입니다.
확실하게,
당신은 자신이 세뇌 되여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4-2 확정편향심리
우리가 어렸을 때, 주변에서 부단히 떠들어대는 소리에 물들어버린다면, 자신도 모르게 그 소리의 진실성 여부는 우리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우리는 그 소리에 취하여
‘매우 자연스럽게 그 소리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인간은 듣고자 하는 것에 귀 기울이는 경향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는 정보에는 주의를 기울이지만, 그렇지 않은 증거는 구실을 달아 애써 무시해 버린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부정확하고, 부실하고, 실로 어리석은 정보에 기초하여 많은 결정을 내린다.
“확정에의 편향”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념이나 선호에 어긋나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것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사결정이 “확정에의 편향”을 피할 수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일단 일정한 감정을 - 설령 무의식적으로 라도- 품게 되면 그러한 편향에서 벗어나기란 무척 어려워진다. 이러한 편향은 특정 인물, 특정 사항에 대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 받은 인상 때문에 무엇인가를 싫어하게 됐다든지, 그 후에 좋은 점을 보더라도 그러한 첫 감정이 변하지 않더라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첫 인상이 중요하다. 모든 의사결정의 절반 이상이 이때 이루어진다.”라는 법칙은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더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남으면 결국 고착되어 버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를 무너뜨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갑돌이’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으면,
설령 갑돌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실수는 병가지상사다. 사람은 누구나 다 살다보면 잘못 할 수도 있다. 우리는 다 실수하면서 세상 배우는 거야”
하면서 애써 그냥 넘어 갑니다. 그래야 우리 속이 편안 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갑돌이에 대해 평소 나쁜 인상,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면 어찌될까요.
“그래 내 그럴 줄 알았다.
저 자식은 하는 일이 꼭 그래.
저놈은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니까.
저런 자식은 쓸어버려야 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야 우리 속이 편안 합니다.
이토록 우리가 확정편향에서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기존의 인식의 잘못을 깨닫고, 이에서 벗어나 거듭난다는 것은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오죽이나 어려우면 ‘뼈를 깍는 고통-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귀하가 진정으로 열린 사고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면 이토록 ‘확정편향’에서 벗어나 진실에 눈을 떠 새로운 세계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왜? 귀하는 존귀한 분이시니까.
귀하는 소가 아니시겠지요?
우이독경(牛耳讀經),
소에게는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가르쳐도 소용없다는 말이지요.
우리 같이 힘써 각성하여 소가 되지 맙시다.
우리나라의 좌우파에 대해,
당신은 어떻습니까?
‘확정편향’에서 벗어나 계십니까?
5. 반 컵의 물
여기 반 컵의 물이 있습니다.
이를 표현하는 3가지 말이 있습니다.
물이 반 컵 있구나.
물이 반 컵이나 있구나!
물이 반 컵 밖에 없네!
자, 이중에 어느 말이 옳은 말일까요?
첫 번째의 객관적 표현,
두 번째의 주관적이지만 적극적 표현,
세 번째의 주관적이지만 소극적 표현,
이 셋 중에서 어느 말이 옳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셋 모두 올바른 표현입니다.
다만,
세 표현이 각각 틀린 점은 그 바라보는 시선이, 관점이 틀리다는 점입니다.
바라보는 관점이 틀릴 뿐이지, 표현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세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가 시쳇말로 개 눈에는 무엇 만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김일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권력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일반시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십니까.
사장님의 눈이신가요, 종업원의 눈이신가요.
남자의 눈인가요, 여자의 눈인가요.
당신은 젊은 분이신가요, 나이가 드신 분이신가요.
조용히 마음을 갈아 앉히고,
나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내 마음속을 들여다봅시다.
이 눈이 결정 되였을 때, 세상은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배부른 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노란 개나리 만개한 이 따뜻한 봄날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고, 어린아이 보습학원비를 챙겨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이 아름다운 봄의 풍경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로 할까요?
6. 도봉산
6-1 주초위왕
1519년 11월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는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새로운 국가질서를 수립하여 이상 정치를 주장하던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파를 역적으로 몰아, 잡아 죽였다.
소위 나뭇잎에 벌꿀을 이용하여 주초위왕(走肖爲王... 走肖 즉 趙가 왕이 된다)이라고 새겨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아간 것이다. 이것이 조선 왕조시대 4대 사화로 유명한 기묘사화다.
이후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이어져 이 퇴계, 이 율곡 등의 유학자에게 전해져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士林)에게는 정신적 표상이 되였으며, 한국유학의 기본성격을 형성하게 되였다.
1573년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선조로 부터 도봉(道峰:도의 으뜸)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울 북쪽 산허리에 도봉서원을 창건하게 되였다.(道峰山이름의 유래)
이를 보면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가 죽일 놈인지, 역적으로 몰린 조광조가 죽일 놈인지는 분명해진다.
21세기 버전으로 풀어보면 보수파가 진보파를 간첩으로 몰아 잡아 죽인 것이다.
박정희, 전두한 정권 때까지도,
①정적을 제거하거나,
②사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③그리고 시민들의 억압된 분노와 스트레스를 표출하는 창구로서 이용하고자,
국가보안법을 줄기차게 이용하여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당신께서는,
용공세력 물러가라!
종북세력 규탄한다!
빨갱이를 때려잡자!
라고, 외처대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흔히 우리들은 정치하는 놈들은 모두 죽일 x들이라고 욕을 해댑니다.
그 죽일 x들이 과연 종북세력 물러가라고 소리치는 것은, 진정 그들이 나라를 사랑해서 일까요, 아니면 그들의 이익을 챙기고자하는 술책일까요.?
그 정치인들이 남곤의 후예일까요, 아니면 조광조의 후예일까요?
“전하!
저 역적의 도당들을 청산하여 종묘사직을 보전 하시옵소서!” 부르짖던 충신 남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역적 조광조는 청사에 길이 그 이름을 남겨 후세의 귀감이 되였습니다.
진실한 애국자는 애국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
그 분이 진정 애국자 이십니다.
6-2 애국(愛國)이란?
이하 <좌우파 사전> 115쪽 ~ 요약
⌈미국 유학시절에 이사하면서 언제나 들던 생각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마치 지구촌과 같아서 지역을 옮기면 금방 다른 국가로 이주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가 주로 살았던 뉴욕 맨해튼은 지구촌 의식을 가진 세계 시민주의적 색채가 강한 동부 엘리트의 고향이다. 그곳 학교 학부모 모임에서 갓 이사 온 어느 학부모가 눈치 없이 왜 국기에 대한 충성맹세의식(Pledge of allegiance)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져 좌중이 썰렁해진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외각의 서민 주거지로 이사하자 그곳의 모든 학부모는 너무도 당연하고 경건하게 국기에 대한 맹세에 참여하였다.
한국에 돌아왔을 당시 유시민 의원이 국회 첫 등원에서 국기에 대한 맹세를 파시즘의 잔재라고 거부하고, 보수진영은 이를 애국적 의식을 거부하는 좌파의 철부지 행동이라며 맹렬히 비난 했을 때, 필자는 한 합중국 내에 두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미국을 떠올렸다. 심지어 2009년 한국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고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에서 ‘애국’이라는 화재가 얼마나 민감한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애국과 관련된 화재는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언제나 좌와 우가 서로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는 인화성 물질이다. 흔히 보수는 진보가 애국심이 없다고 비난하고, 진보는 보수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 국민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점과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체제를 거치면서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시민(市民)>보다는 과대 성장한 <국가에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신민(臣民)>으로 살기를 요구받았다. 한때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모두가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읊어야 했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비틀린 역사가 만들어낸 웃지 못 할 장면이었다.
따라서 1970년대 박정희 정권과 1980년대 전두환 정권시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좌파에게 애국은 권위주의 정권이 체제유지를 위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로 간주되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짓밟고 동족인 광주 시민을 향해 군대를 동원하여 총을 내갈긴 정권을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도, 애국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이슈들이 제기되고 있다. 보수 진영 내에서도 애국이 곧 국가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반성이 일어나고 있고, 진보 진영 일각에서도 애국이라는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무엇이 애국주의여야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國歌 부르기 등이 과연 애국의 척도가 될 수 있는가? 정권 사랑하기를 포장하여 애국, 나라 사랑하기 로 감추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귀하는 정권사랑과 나라사랑을 구분하고 계십니까? -
6-3 순교
2012년 5월 30일 서울 북부지법 형사 11부(부장 김재환)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궐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를 ‘사탄 마귀’에 빗대고 교인들에게 투표하지 말 것을 권유해,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된 김홍도(74) ‘00 교회’ 목사에게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김 목사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3일전 예배에서 “서울에 사탄 마귀에 속하는 사람이 시장이 되면 어떻게 하나”라며, “이번 선거가 잘못되면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진다.”고 설교했고, 박 후보를 비난하는 지역신문 호외 편을 나눠준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부는 “대형 교회 목사인 김 씨가 선거에 임박한 시점에 특정 후보자를 반대하는 내용의 발언을 했고, 동종 범죄전력도 있다.”고 양형이유를 밝혔다.
김 목사 쪽은 “위 같은 말은 목사가 예배 중에 통상적으로 할 수 있는 표현에 불과하고, 특정 후보의 실명을 거론한 바도 없어 선거 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피고인의 발언 내용과 신문기사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이 말한 사람이 박원순을 지칭하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며 김 목사 쪽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은 박 후보를 비난하는 내용의 지역 신문을 제작 배포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된 기독교 사회책임 공동대표 서경석(64)목사와 김병관(58)전 서울시 재향군인회장에게도 각각 벌금 200만 원을 선고했다.
위와 같이 우리나라 대형 교회의 원로 목사님께서 법원에 의해 실정법 위반의 죄를 선고 받았다는 것은 매우 마음 아픈 일이며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사탄(satan)’이란 용어는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종교용어이며 사용자가 목사라는 점, 또한 사용처가 교회 안이며, 사용한 때가 예배시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종교적으로 사용한 것이 분명해 진다. 그러면 김 목사께서는 ‘사탄’과의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지난 교회사를 보면 위대한 목회자님들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김 목사가 진실로 우리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사탄’으로 부터 지키고 보호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였다면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특정 후보의 실명을 거론한 바가 없다.”는 따위의 비겁한 짓을 당장 걷어치우고, “박원순이는 진실로 사탄이다.”라고 외치며 사탄을 물리치는데 순교자의 거룩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탄’의 제거를 위해서라면 편안한 교회 안에만 머물 일이 아니고, 피를 토하는 가슴을 안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종교인의 영광된 모습일 것이며, 원로 지도자의 진실한 모습이 되어 뒤에 따라오는 후배들뿐만이 아니라, 이 땅의 일천만 기독인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탄 박원순’을 물리치는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린 베드로의 뒤를 이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참된 기독인, 참된 ‘00 교회’ 수만 명 추종자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00 교회’의 참된 목회자, 참된 원로 지도자의 모습 아니겠는가.!
그렇지 아니하고 만약 그가 정치적 ‘쇼’로서 멀쩡한 사람을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빌려 ‘사탄’으로 몰아가고자 하였다면, 이는 ‘00 교회’ 수만 명의 신앙에 먹칠을 한 것이다. ‘00 교회’ 기독인들은 그를 좁은 교회에서 놀게 하기 보다는 여의도 국회로 진출하시게 하여, 보다 넓은 세상에서 ‘구차한 변명’없이 마음껏 정치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00교회’ 수만 명의 신도가 일체합심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순교자’도 되기 싫으시고, ‘정치인’도 되기 싫으시다면 00교인들께서는 어찌해야 하는가?
참된 종교인도, 정정당당한 정치인도 아닌, 사이비가 순결한 종교인의 탈을 쓰고, 거룩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인들을 엉터리 길로 인도하고 있었지 아니한가.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종교’라는 보호막 안에서, ‘빨갱이, 사탄’을 외치는 분들을 우리는 국회로 보내야 한다. 이 땅에 진실된 목회자 분들께서는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빌어 ‘정치’를 말하지 않는다.
다음의 글을 하나 더 보면 우리가 받들어야 할 목회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다. 정치를 말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귀를 막아라. 그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그런 것이 아니라 거꾸로 틀린 길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걸어야 할 종교인의 길, 바른 시민의 길이 여기에 있다. 나는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시민의 올바른 길을 말하고 싶다.
바른 종교인의 길이 곧 바른 시민의 길이요,
바른 시민의 길이 곧 바른 애국의 길이다.
다시 말하면 바른 종교인의 길이 곧 바른 애국의 길이다.
6-4 <친구 아무개 목사에게>
⎾오랜만이네, 자네 직업이 성직자, 목사이기 때문에 우리 같은 속물들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소식을 전해주는 친구가 있어, 자네 소식은 이따금 듣고 있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번 초등하교 동창모임에서 자네 이야기가 나왔네. 회사 다니다가 근자에 그만 둔, 아니 잘린 친구 몇몇은 자네를 퍽 부러워하더구먼. 한 해에 연봉이 몇 억이고, 정년도 아직 한참 남았다면서 말이야. 나도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네. 자네 교회가 세상에 유명한 아무아무 교회처럼 몇 만 명의 신도를 가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 명을 넘는 신자가 있고, 거기다 교회가 부자동네에 있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오늘 이렇게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날 그 모임에서 나온 자네 이야기 때문이네. 그날 모임에서 자네가 일본에 쓰나미가 일어난 것을 두고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네. 그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네. 왜냐하면 쓰나미에 죽거니 다친 사람들 중에는 적기야 하겠지만 기독교 신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네. 솔직히 말해 안 믿는다고 쓰나미로 자신의 피조물을 그렇게 비참하게 죽여 버린 하느님이란 존재를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네.
자네 말을 전해 듣고 나는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던 사람을 구한 사마리아 사람이 생각났네. 예수님은 거지반 죽게 된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의 이웃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 하셨네. 아마 예수께서 쓰나미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면, 눈물을 쏟으시고 크게 슬퍼하셨을 것이네.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셨을 것이네.
이왕 말을 꺼냈으니, 몇 마디 더 함세. 자네는 새벽이면 아랫사람을 거느리고 교회에 가서 큰 소리로 무엇 무엇을 바란다고 기도를 한다는데(하기야 보통 기독교 신자들도 다 그렇지만), 정말 이해가 안 되네. 예수님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지 말고, 아무도 안 보는 골방에서 기도하되,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자네가 믿는 하느님은 전지전능한 분이시니 자네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자네 마음을 다 아실 것이네.
어떤 친구는 자네가 강남의 값비싼 아파트에 산다고 또 부러워하더군. 과연 그런가. 예수님은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오직 자신만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예수님과 그렇게 다른가. 자네는 또 세금도 내지 않는다 하였네. 정말인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자내는 교회가 늘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으리으리한 수백억짜리 교회를 지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겠는가. 또 예수님은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시며 지팡이 외에는 돈도 먹을 것도 가지지 말고, 신발도 그대로 신고, 속옷도 껴입지 말라고 하셨네. 그런데 자네는 번쩍이는 양복에 어찌 그리 값비싼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가.
자네 알다시피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네. 아니 어떤 종교도 믿지 않지. 하지만 성경은 종종 읽어 본다네. 그런데 자네의 말과 행동이 성경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니, 나로서는 자네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네. 어릴 적 친구니까 무람없이 부탁하네. 자네 제발 예수를 좀 믿어보게. 자네가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에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말이 있는데,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니 좀 아니 좋은가.
물론 나는 그냥 이렇게 살다가 ‘불신지옥’을 택하겠네만, 자네는 직업이 직업인만큼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보다 자네가 먼저 예수를 믿어야 남에게 믿어라 하지 않겠는가.
부디 먼저 믿고 천당 가시게.⏌(2011/04/05/ 한국일보-아침을 열며- 강명관 부산대 교수)
6-5 종북세력 물러가라!
미국에서 노동자와 서민, 사회적 약자의 지지를 받는 정당은 물론 민주당이다. 그런데 2000년 대선에서는 친 기업적이며 부의 재분배에 소극적인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미국의 진보지식인 토마스 프랭크는 상식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 같은 현상의 배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고향이자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인 중서부 ‘그레이트 플레인스(대초원)’ 캔자스로 갔다. 그 지역은 부시와 엘 고어가 무승부나 다름없던 그 대선에서 부시에게 80%의 표를 몰아준 곳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당에 몰표를 던지는 이유를 그는 그곳의 정치인과 시민운동가들을 만나고, 주민의 정치의식이나 행태 변화를 관찰하면서 해명해 간다. 결론은 보수 공화당이 부자 편향이나 친 기업 같은 본질은 뒤로 감추면서, 낙태나 종교 문제 등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 조직적으로 시민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동안, 자유주의 민주당은 나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이 유권자들이 현혹당하는 데에는 민주당 세력이 빌미를 제공한 측면이 적지 않다고 지적한다. 어차피 노동자들은 우리 사람이라고 생각한 민주당 지도층은 블루칼라 유권자들을 잊고, 대신 자유주의 성향의 부유한 화이트칼라 전문가들을 끌어 들이기 바빴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강조하는 데 열심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보수화는 ‘노동자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조롱하고 경멸하며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 버린’ 민주당의 ‘어리석은 전략’의 결과라고 저자는 거듭해서 강조한다.
그가 책에서 예견한 대로인 부시의 재선은 ‘건강한 공장 노동자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암송’하면서 스스로 자기 목을 조르고‘가난한 소농들은 자신들을 땅에서 내쫓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표를 던지는’ 아이러니의 산물이었다.
지금 한국의 진보가 권력다툼으로 지리멸렬한 사이 보수는 순식간에 얼굴 화장까지 고치고 ‘종북타도’라는 낡은 이데올로기로 시민들을 현혹하려 들고 있다. 2000년 미국 대선이 2012년 한국의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한국일보 김범수 기자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의 서평에서)
7. 좌우파의 탄생
1789년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루이 16세의 무능하고 부패한 왕정에 항의하여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 시민혁명으로 인한 제헌의회의 시기에 의장석에서 볼 때 좌편에는 하층계급에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더 많이 부여하고자 하는 노동자, 수공업자, 소상인, 소자작농. 농업노동자 등의 지지를 받는 급진파 자코뱅파가, 우편에는 기존의 왕족, 귀족의 보수파 지롱드당이 자리 잡게 되였다.
이때부터 보수파를 우파, 진보파를 좌파라고 부르는 정치용어가 기원하게 되었다.
이후 20세기로 들어가며 우파는 더욱 더 오른쪽으로, 좌파는 더욱 더 왼쪽으로 분화되어 나갔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현대세계의 이념적 구분을 도식화 해보면 다음과 같다.
무정부주의 |
사회주의 |
사회 민주주의 |
자유주의 좌파 |
자유주의 우파 |
보수주의 |
극 보수주의 |
파시즘 |
△ 현대의 유럽 : 자유주의 좌파와 자유주의 우파 사이
△ 미 국 :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사이
△ 한 국 : 한국전쟁 이후부터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부 까지는 보수주의와
극보수주의의 사이,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자유주의 우파,
이명박 정부는 보수주의
△ 극 보수주의 : 프랑스의 드골주의, 박정희의 유신체제
△ 파시즘 : 히틀러, 무솔리니
△ 사회주의 : 공산주의 국가
✻ 1789년 7월 14일,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윌리엄 워즈워스는 이렇게 그 날을 노래했다.
- 그 새벽에 살아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노라.
젊다는 것은 천국과도 같았느니라. -